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옥산 사건 (문단 편집) === 해군의 가세 === 한편 육군이 만주에서 신나게 승전보를 올린 것을 본 해군도 배가 아파서 이번엔 해군이 나서야 할 차례라고 전쟁을 선동했다. 당시 육군 포병감 하타 슌로쿠의 일기에 따르면 1월 26일 해군 차관 사콘지 세이조가 "육군이 만주에서 활약한다면, 이번에는 남에서 해군의 차례다. 기대가 크다. 무리하게 일을 꾸며도 육전대는 어제의 육전대가 아니고 2천명, 야포, 장갑자동차가 있어 괜찮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한다. 당시 일본 해군은 화중, 화남 일대에 시오자와 고이치 소장 휘하의 제1파견함대를, 화북에 쓰다 시즈에 소장 휘하의 제2파견함대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만주사변 이래로 중국의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제1파견함대에 순양함 덴류, 부설함 도키와를 증파하는 등 해군의 움직임은 진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22일 일본 해군 제1파견함대 사령장관 시오자와 고이치 소장은 '상하이 시장이 만족스런 회답을 주지 않고 요구하는 바를 즉시 실행하지 않으면 해군 사령장관은 일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수단을 채택하겠다.'는 설명을 발표했고 황포강에서 일본 해군 함정들이 무력시위를 가하며 중국 선박들을 마구 나포했다. 24일까지 일본은 거류민과 선박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상하이 주둔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지나파견함대에 항공모함 노토로, 순양함 오이, 구축함 5척, 포함 1척, 부설함 1척, 순양함 유바리를 기함으로 하는 제1수뢰전대, 구레와 사세보에서 증파된 해군 육전대를 더 붙여주었다. 오이에 탑승하고 있던 200명의 육전대는 즉각 상륙하여 강만로의 육전대 본부로 진입했다. 일본 해군이 상하이 교외의 무선전신국과 상하이의 국제전신국을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도 퍼졌다. 이런 해군의 무력을 등에 업은 무라이 총영사는 24일 우톄청에게 "주어진 기간 내에 만족스런 회답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겠다." 하고 위협하고, 27일 최후통첩을 보내 28일 오후 6시까지 대답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우톄청은 상하이 각계 항일 구국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경찰을 파견하여 이들을 봉쇄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항일단체를 해산하라고 윽박질러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